RAINEYE

5·18민주화 운동

5·18 열흘간의 항쟁(1980.5.1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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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진 이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18일에서 27일 사이에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고, 당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80년 이후에 사망한 사람도 백 명이 넘는다. 군인과 경찰도 26명이 사망했는데, 군사망자는 대부분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고였다.

      이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행한 군사반란(쿠데타)의 연장이었다. 이 군인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항거하면서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군인 집단은 나중에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렸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권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행위에 당당히 맞선 이 열흘간의 항쟁은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이 항쟁을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신군부가 일으킨 내란과 반란 행위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이 전대미문의 국가폭력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역사적 진실이 국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6월 항쟁의 산물인 6공화국 정부는 국민 화합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불순분자의 폭동이나 내란이 아닌 ‘민주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당을 점하게 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의 조사 활동과 청문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자행한 잔혹한 폭력의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가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고, 처절했던 10일 간의 항쟁이 민주주의를 염원한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이었음이 알려졌다.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라고 알려진 광주 문제 관련 특별 성명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이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 정부”라고 규정하였다. 열흘간의 항쟁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숭고한 시민운동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다.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면서 당시 학살과 인권 유린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광주의 피해자 단체를 비롯한 전국의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는 1995년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등 가해자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5-97년에 걸쳐 이루어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가해자 15명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화와 정의 실현을 위한 열망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에 대한 결심 판결에서 신군부는 국가를 전복하여 정권은 탈취할 목적으로 결성한 내란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반해 광주 시민의 항쟁은 이러한 내란 세력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헌정 질서 수호 행위로서 법적,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가해자 정권 시절에 내란, 폭동으로 매도되던 사건이 숭고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민주화운동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셋째, 5‧18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저항권의 정당성과 나아가 그 저항권 수호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달리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시민의 ‘무장투쟁’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7년에 우리나라 대법원은 초법적인 군부 집단에 맞선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행위는 불법적인 폭동이 아니라 저항권에 기초한 시민 불복종 행위이자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비록 우리나라 헌법에서 국민의 저항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재판부의 이러한 인정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법정신과 부합함을 확인해주었다.

      넷째, 열흘간의 항쟁 기간 중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치 공동체 정신은 시민의 자발적 협동과 이타적 나눔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사회 질서 유지의 기본 원리임을 증명하였다. 경찰과 행정 등 정부의 기능이 일시 정지된 상태에서도 광주에서는 강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민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평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헌혈’과 ‘주먹밥’은 바로 이 경이로운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으며, 국가 차원에서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교과서에도 이 내용을 수록했다. 희생된 분들이 묻힌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항쟁의 현장은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5‧18 정신을 반영한 헌법전문 개정안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 5‧18민주화운동은 엄청난 왜곡과 폄훼의 대상이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하에서 이러한 왜곡과 폄훼는 더 극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일으킨 내란으로 매도되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북한군 수백 명이 몰래 침투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광주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7년의 사법부의 판결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학살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궤변을 주장함으로써 희생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국가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국민들 앞에 그 역사적 의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진상규명”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19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정확히 몇 명인지, 5월 27일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그곳에서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등에 대한 핵심적인 진상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8년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 사건의 진상을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활동이 추진되고 있다. 이 진상규명 작업을 토대로 이 열흘간의 항쟁은 민주화운동, 시민불복종운동, 아름다운 공동체 운동으로 국민들 앞에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1979년 12월 12일의 군부쿠데타, 그리고 1980년 5월 17일까지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동기가 5‧18민주화운동과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유신체제의 붕괴

    가. 정치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은 기본적으로 군부독재 집단과 국민 사이의 대립 관계가 반영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 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 체제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도농 간 불균형 발전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상의 고통도 매우 컸다.

      유신체제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서도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제10대 총선의 충격으로 유신정권은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 면제로 석방되었다.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적으로 묘한 대립관계에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하여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에게 정권 교체의 큰 희망을 심어줬고,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나.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한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 씨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원들이 뽑은 대표를 사법부가 독재정권이 내세운 인물로 강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일련의 비정상적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 부산‧마산 민주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로 발전하였고, 이 열기에 고무된 학생들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부산 시내로 진출하였다. 부산시민들은 이 시위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의 상징인 경찰서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는 등 사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게 되었다.

      10월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도심으로 진출한 시민·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여기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나중에 광주에 투입된 3공수부대였다.

      10월 18일 아침,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릅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 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대는 수 만 명으로 불어났고, 병력을 추가 투입하여 시위진압에 나섰으나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 명의 무장군인이 마산 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봉급생활자 등 일반시민이었다.
    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부마민주항쟁은 공수부대의 무력에 의해 진압됐지만, 그 충격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유신독재 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 부마민주항쟁이 끝난 지 1주일 후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은 청와대 인근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수습방안을 둘러싸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공수부대 투입을 성공적이라고 주장하는 차지철과 달리 김재규는 강압적인 탄압으로는 더 이상 유신체제를 존속시키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은 200만 명을 희생시키고도 정권을 유지했는데 우리도 100만 명쯤 못 죽이겠느냐’고 섬뜩한 말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부산‧마산의 사건이 다른 대도시로 번지고 서울에서도 진압되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의중까지 내비쳤다. 김재규는 더 이상 이런 강압적인 유신체제를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은 일거에 무너졌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몰락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거나 대중의 힘에 의해 권력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 권력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 그 자체를 떠받쳐온 세력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밀정보조직, 정치군인집단, 경찰과 검찰을 핵심으로 한 관료집단, 독점재벌, 그리고 유신체제를 후원해온 미국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2. 신군부의 하극상, 12·12쿠데타

      대통령의 유고가 확인되자 10월 27일 새벽 2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헌법에 의해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정부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바로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대통령 저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보안사령부를 포함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정부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 지휘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한편 10‧26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을 맴돌며 출세만 노리던 ‘정치군인’을 선별해서 숙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치군인’은 박정희 대통령 비호 아래 군부 내에서 최대의 사조직으로 성장한 ‘하나회’를 의미했다. 박 대통령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충직한 사조직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 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육사 졸업생 가운데 ‘영남인맥’의 우수한 장교들만 뽑아 비밀리에 운영했던 하나회는 군 내부의 주요 보직을 독차지하면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최대 후견인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동안 잘 나가던 하나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조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D-day를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뒤 하나회 출신 소장파 장교그룹을 설득, 합류시키기로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군사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미 정 총장을 연행해 놓은 상태에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며 재가를 거부했다.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고, 육군본부에서 부대를 이탈한 지휘관들에게 부대복귀 명령을 내렸음에도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의 연금조치를 취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때까지 최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함으로써 전두환 등 경복궁 30경비 단장실에 모인 지휘관들의 정승화 총장 연행은 명백하게 ‘불법행위’ 즉, 하극상의 군사반란이었던 것이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5‧18상고심’에서 정승화 총장에 대한 강제 수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의 체포 목적이 범죄를 수사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한 체포행위’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때 사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았고, 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는 긴급한 사정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법률에 규정된 체포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재가를 받기 위해 집단으로 대통령을 강압한 사실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반항하는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반란군 지휘부는 무력을 통한 사태 장악만이 유일한 길이라 판단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무력진압”을 지시하였고, 13일 새벽 1시경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3일 새벽 2시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특전사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지시하였다. 새벽 3시경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사령관실로 총격을 가하며 난입한 자신의 부하 총에 총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은 제2기갑여단장 이상규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도기갑사단 전차에 대항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동원을 요청하였고, 노태우 사단장은 전방의 9사단 29연대를 즉시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도록 지시하였다. 9사단 29연대와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는 도중에 합류,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에 진주하였다. 박희도 소장의 30사단 90연대는 반란군 지휘부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청을 점령하였다.

      마침내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 등 8명의 장성들도 무장해제 당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한 후 그를 데리고 새벽 5시경 청와대로 갔다. 최 대통령을 만난 노 장관은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정 총장 연행조사의 재가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최 대통령은 더 이상 별다른 말없이 문서에 서명하였다. 사실상 강제로 쿠데타를 추인하는 서명이라는 사실을 최 대통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의 맨 아래에다 ‘05:10 AM’이라고 적었다. 대통령으로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티다가 최종 순간 서명했다는 점을 분명한 역사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의미였다. 어찌됐던 신군부의 거사는 대통령의 재가를 통해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대법원은 대통령의 재가를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장성들이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후 이뤄진 것으로 ‘사후 승낙’에 불과하며, ‘반란행위에 해당하는 정승화 총장의 체포행위나 병력동원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일부 군인들이 육군의 정식지휘계통에 대항하여 병력을 동원한 행위는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참모총장의 군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이날 밤 쿠데타에 소요된 시간은 12월 12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5천여 명 규모의 병력과 전차 35대가 불법 동원됐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정규 전투부대가 서울로 진입했으며, 육군본부 지휘체제가 완전 마비됐다. 또한 한미군사협정을 위반하여 한미연합사령관의 사전 동의 없이 전방에 있던 9사단 병력을 수도권으로 이동하였다. 전두환 사령관은 다음날 국방부 금고를 뒤져 찾아낸 공금을 가지고 마치 전리품처럼 쿠데타에 동원된 부대들을 돌며 격려금조로 5천만 원씩을 나눠주었다.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사령관은 군부에서 사실상 최고 실권자가 됐다. 그는 다음날 아침 곧바로 군 주요보직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군 공식 지휘계통을 하나회 멤버이거나 우호적인 인물들로 완전히 바꿔서 이른바 ‘신군부’ 주도세력을 형성했다.

    3. 신군부 반란세력의 정권탈취

      반란세력은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8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우선 신군부는 최규하 내각 장악을 위한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 번째가 비상계엄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동수사본부의 권한 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였으며,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언론통제계획인 ‘K-공작계획’을 수립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공석 중인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노렸다. 중앙정보부장이 되면 첫째, 국무위원급으로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둘째, 중앙정보부가 보유한 풍부한 비밀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말경, 전두환은 신현확 총리를 협박해서 중앙정보부장 추천을 받았고, 4월 14일에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의 추천으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굳이 ‘서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중앙정보부장의 타직 겸직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보안사령관이면서 동시에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 수 없게 돼 있는데 이를 피해가기 위한 꼼수였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겸직 이후부터는 실무자가 아닌 ‘주요각료’의 일원으로 내각이 결정하는 정책방향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또한 국회의 감사를 받지 않고서도 중앙정보부의 일부 예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신현확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유신관료 집단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다면, 이른바 K-공작으로 알려진 보안사령부의 언론장악 계획은 국민여론을 신군부의 입맛대로 조작하기 위한 조치였다.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1980년 3월경 작성한‘ 이 ‘K-공작계획’의 ‘K’는 ‘King(왕)’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명칭인데,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군부는 ‘언론공작반’을 통해 언론사 사장 및 간부들을 차례로 접촉, 회유공작을 실시했다.

      1980년 2월 18일, 신군부는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공수부대와 후방의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충정훈련은 군이 시위진압을 위해 실시하는 공세적인 진압 훈련이었다. 신군부는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시위와 시민들의 저항을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아예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충정훈련’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 부근 일반부대가 참여하였는데 이들을 ‘충정부대’라 했다.

      1980년 4월에 들어서면서 폭동진압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전의 방어적, 수세적 훈련과는 달리 시위대를 향하여 돌격하여 와해시킨 뒤 재집결을 허용하지 않고 주모자를 체포하는 공세적 훈련으로 전향해서 실시하였다. 또한 길이 45~70cm, 직경 5~6cm의 물푸레나무 혹은 박달나무로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크고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여 특수 제작한 진압봉을 대량으로 만들어 부대원들에게 지급하였다. 또한 신속한 시위 진압을 위해 기동에 유리한 경무장과 진압봉을 반드시 휴대하게 하였다. 신군부는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즉 투옥시키고 그래도 안 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5월에 들어오면서 대학가의 시위 쟁점이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 등 정치적 구호로 모아지고 학교 밖으로 진출하려는 조짐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여 신군부는 병력을 은밀하게 이동 배치하는 등 5월 첫 주부터 사실상 군대를 앞세운 진압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신군부가 장악한 언론은 ‘K-공작계획’에 따라 이미 재갈이 물려져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런 음모를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5월 4일 권정달 정보처장 등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은 보안사령관실에서 12‧12사태 이후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핵심세력들에게 자신들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한 후 토론을 거쳐 이 ‘집권 시나리오’를 확정했다. 이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은 신군부가 이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5월 17일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고, 강압적으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 선포하였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행위가 바로 ‘내란’의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명분을 찾기 위해 ‘북한이 남침하려 한다’는 첩보를 조작하여 위기감을 조성했다. 5월 10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보안사령부로 찾아온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으로부터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군의 남침첩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첩보는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5월 15일에서 5월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은 참모들에게 즉각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 내용은 전두환이 신현확 총리에게 전달했고, 5월 12일 임시국무회에서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장관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자 이런 소식을 접한 한미연합사 사령관 존 위컴(John Wickham) 장군은 ‘전두환 장군이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신군부가 퍼뜨린 남침설 첩보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각조사실 한국담당 과장도 2010년 한국 기자에게 당시 '북한의 남침 첩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전면 부인했다.

      1980년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도 곧바로 첩보내용을 자체 분석했는데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휴전선에서 관측된 북한 측 지상군은 정상 수준이고, 병력 및 장비를 증가하는 징후도 없으며, 모든 전선에서 대전차 장애물, 교량공사 및 영농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항공정찰(SLAR)이나 특수첩보 상으로도 모두 정상이었다. 북한 해군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훈련만 진행했다.

      육본 정보참모부는 5월 이전에 입수된 북한관련 첩보에도 이와 유사한 동향보고가 많았지만 모두 다 사실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렸다. 만약 북한이 실제로 남침을 감행한다면 전쟁을 위한 준비가 구체적으로 포착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지상군을 주요 접근로 상에 배치하고, 전차 및 기계화사단 등 전략부대의 전선 이동, 군수지원 활동과 통신량 증가 등 전쟁 징후가 관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징후들이 포착되지 않았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육본 정보참모부는 ‘북괴 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 수준으로 특이 전쟁징후는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첩보’를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4. 좌절된 민주화

      1980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여느 해와 달리 전국 각 대학의 캠퍼스는 활력이 넘쳤다. 10‧26 사건 이후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로 다가왔다. 막연한 기대감과 원인 모를 불안감이 뒤범벅돼 있었던 이 시기는 ‘민주화의 봄’이라 불려졌다. 대다수 국민들도 18년간의 오랜 독재정치가 끝났기 때문에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유신잔재세력을 제거하고, 정권 장악을 노리는 정치군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민주화’는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

      이 ‘민주화의 봄’ 시절 대학가의 최대 현안은 학생의 자치 조직인 총학생회 부활이었다. 전국의 주요 대학 학생들은 유신체제에서 정부가 강제로 만들었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대학이 자율화되어야 정치체제와 사회가 민주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학생회 부활 등 학원민주화 투쟁 단계를 거쳐서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 등 정치 민주화운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 운동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는데, 총학생회가 이 훈련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

      5월 13일까지의 기간은 대학가의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대정부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5월 13일로 접어들면서 대학가의 시위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위대가 교문 밖으로 진출한 것이다. 서울 도심 광화문 일대에서 6개 대학 2천5백여 명의 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부르짖으며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고려대 등 7개 대학 일부 학생들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도심 곳곳에서 학생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14일 새벽 4시 30분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 차원에서 공식적인 연대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학생 대표들이 헤어진 뒤 7시간이 지난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등을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수만 명이 진출하였다. 이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신말기의 탄압 속에서 시민사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 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했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날 서울 이외 지방에는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다.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에 정치권은 황망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신민당은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정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방법에 의한 사태 해결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시위 열기가 폭발할 듯 고조되고 있는데 갑자기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철수해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총학생회 대표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하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했다. 입수한 병력 이동 정보에 따르면 곧바로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서울역에 있던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했다. 다음날 아침, 서울의 대학가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전남대 등 광주지역 대학생들만 1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 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이어갔지만, 토요일인 17일에는 그나마도 자취를 감추었다. 주말을 맞아 각 대학의 교정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5. 1980년 봄 광주의 상황과 ‘5·17’ 비상계엄령 확대

      광주·전남지역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치개혁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조선대학교 등 사립학교에서는 사학재단 비리 척결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1980년 초에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준비조직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4월에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남대 법학과 3학년 박관현이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어용교수 퇴진과 병영집체훈련 거부 등 학생들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고 있는 학교 내 현안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5월 초를 분기점으로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일정 제시 등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 소식이 전달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6일에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여 5월 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성회’ 기간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5월 8일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차 ‘민족민주화성회’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 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양심 있는 교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하였다.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광화문과 서울역 광장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남대와 조선대도 당장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2시 총학생회의 지휘 아래 전투경찰대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돌파한 전남대생 7천여 명은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세력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고, 정세가 너무 불투명하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시위에 선뜻 동참하지 않았다.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계속되었다.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생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청년, 시민 등 수 만 명의 인파가 도청 광장에 집결했다. 특히 전국의 모든 지역이 시위를 중단한 가운데 개최된 5월 16일의 시위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으며 밤이 되자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그간 세 차례에 걸친 민족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였다. 당시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찾아와 평화시위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하자 흔쾌히 받아들여 경찰과 학생 사이에 아무런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제 자신들의 의사는 충분하게 전달했으니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과 18일은 쉬기로 했다. 만약 정부가 계엄해제와 향후 정치일정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한편 16일 도청 앞 집회에서 대학생들은 만약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일차적으로는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강렬한 민주화 요구에 힘입어 신민당은 5월 14일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도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이로써 5월 20일 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 결의안을 양당이 공동 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여기에 유신체제를 지탱해왔던 ‘유신정우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신군부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신군부는 한껏 달아오른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사회혼란을 조장하여 북괴의 남침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사회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무력을 앞세운 권력 장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5월 1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43명의 장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①비상계엄 전국 확대 ②국회해산 ③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이 논의되었다. 국방부장관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합의된 의견이라고 서둘러 결론짓고,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로부터 ‘연서명’을 받았다.

      5월 17일 밤 9시42분 중앙청에서 제42회 임시 국무회의가 열려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다. 회의장 주변에는 계엄군들이 무장을 하고 경계를 섰는데, 사실은 국무위원들을 겁박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신군부 계획의 일환이었다. 중앙청 내부 현관과 계단, 복도에는 1~2m 간격으로 군인들이 도열하였다.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헌병단 통신과는 중앙청 내 전화선 2,440개를 모두 절단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상급기관인 육군본부에 병력동원에 대해 전혀 보고하지 않고 공식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한 채 병력을 이동, 배치했던 것이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국무회의가 열렸고, 찬성이나 반대 토론 없이 불과 8분 만에 제주도를 포함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의결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선포하였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한 조치였다. 1997년 대법원은 이날 병기를 휴대한 병력이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폭력적인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도록 강제한 것은 ‘국헌문란’이라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헌법에 정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국가기관인 ‘국무회의’의 권능 행사를 폭력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상태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이 주도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 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5월 18일 새벽 1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계엄포고 원안은 보안사에서 입안하여 계엄사령부로 보내졌다. 주요 내용은 ①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대학 휴교 ③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언론 사전검열 등이었다. 계엄군은 계엄포고령 발령 이전인 18일 새벽 0시20분부터 이미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의사당을 점거해 버렸다.

      포고령을 앞세워 군인들이 국회를 무력으로 점거하여 사실상 ‘국회 해산’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신군부는 대통령이 ‘국회 해산’을 거부하자 ‘계엄포고령’이라는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사실상 국회의 기능마저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한편 경찰은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단 모임이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10여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하였고, 밤 10시부터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2,700명 정도의 학생과 반정부 인사들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밤 11시경 국기문란자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부정축재자로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연행하는 등 다음날 새벽까지 밤중 내내 전국적으로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이때 총 2,699명이 검거됐고, 그 중 2,295명이 훈방됐으며, 404명이 공소제기 되었다. 이와 같은 검거작전은 향후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유력인사들을 정치권에서 미리 제거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 오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이 머리를 맞대고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1. 5월 18일 민주화운동의 발발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단 8분 만에 의결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 92개 대학에 신속히 계엄군을 투입했다. 국회, 교도소, 언론사 등 보안목표 109곳에는 계엄군과 별도로 전차 4대, 장갑차 60대를 배치했다. 18일 새벽 0시 20분 계엄군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기 위한 임시국회를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새벽 1시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 모든 활동을 중지시키는 내용이었다. 포고령에 담긴 주요 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보안사령부가 계엄사령부에 보내 작성한 것이었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즉각 소요배후 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일제히 검거하도록 전국 각 지역 보안부대에 지시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들과 전남대 복학생 등이 연행되어 합동수사단에 끌려갔다.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신군부의 감춰진 실제 목표는 광주였다. 계엄사는 서울에 1‧3‧5‧9‧11‧13공수여단을, 광주에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를 즉각 배치했다.

      공수부대는 ‘충정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 온 특수부대였다. 원래 공수부대는 전쟁이 나면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중요한 인물을 암살하거나 적의 군사시설을 폭파하는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게 주된 임무다. 보통 때는 침투작전에 대비하여 낙하훈련과 천리행군 등을 통해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공수부대를 전방이나 적진에 침투시킨 것이 아니라 ‘충정부대’라고 이름 붙여 정권 보위 목적으로 사용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 3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고, 그 이후 시위진압 목적의 특수훈련을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7공수여단 33, 35대대는 5월 17일 밤 10시 30분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둔지인 전라북도 금마를 떠나 약 2시간 후 자정 무렵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에 도착했다.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 80-5’ 문서에 따르면 7공수는 이미 사흘 전인 5월 14일부터 비밀리에 이동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다. 국무회의 의결 이전인 17일 오전 10시 40분 제2군사령관은 31사단장에게 광주지역 8개 전문대에 31사단 병력 투입을 지시했고, 오후 5시에는 7공수를 위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을 미리 설치했다. 7공수 투입 준비를 비상계엄 확대 이전에 비밀리에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엄군의 움직임을 광주 치안을 담당했던 전라남도 안병하 경찰국장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계엄당국은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채 공수부대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던 것이다.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5월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날 밤 계엄확대와 동시에 밤중 내내 전국에 검거 선풍이 몰아쳤다. 7공수는 광주 도착과 동시에 곧바로 교내 수색에 들어갔다. 전남대와 조선대 도서관이나 학생회관에서 밤을 새우던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에게 두들겨 맞은 뒤 모조리 연행되었다. 전남대에서는 69명, 조선대에서는 43명의 학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갔다. 같은 시각 전북대에서는 7공수가 수색하는 과정에서 농학과 2학년 이세종 학생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날 밤 9시 TV 뉴스에서는 임시국회가 소집되어 ‘계엄령 해제’ 등 민주화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처럼 보도했는데 공수부대가 급습한 것이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전날 오후 늦은 시각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들이 계엄당국에 연행돼 갔다는 소식을 미리 접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 등 지도부는 18일 새벽까지 모두 광주를 빠져나가 여수 등지에 몸을 숨겼다.

      광주지역은 총학생회 지도부의 부재 속에서 일반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민주화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게 됐다. 항쟁의 첫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이었다. 5월 중순 아침 날씨는 약간 쌀쌀했으나 화창했다.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 날 오전 10시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이자’고 마지막 민족민주대성회에서 약속했던 바에 따라 아침 식사를 마친 학생들 몇몇이 전남대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갑작스런 계엄군의 등장으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마비된 것은 다른 지역도 광주와 비슷했다. 만약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생들의 행동 지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18일 오전 계엄확대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민주화 시위를 시작한 곳은 오직 광주뿐이었다.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 일부가 교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점차 불어난 학생 숫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공수부대를 향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숫자가 200~300명으로 더 불어났다. 교문을 지키던 공수부대원이 갑자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위협적으로 달려 나왔다.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위기를 피한 학생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군인들의 예상치 못한 날선 공격에 놀란 학생들은 교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광주역에서 다시 모였다. 어느 덧 학생 숫자는 300~400여 명으로 불었다. 격분한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지인 금남로까지 약 3km를 단숨에 달려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격한 목소리로 주위의 시민들을 향해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두서없이 외쳐댔다.

      11시 30분경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는 500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열에 수녀 50여 명도 합세했다. 금남로 한쪽 차선을 점거한 채 항의농성이 시작됐다. 경찰기동대가 들이닥쳐 최루탄을 뿌려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주시내에는 아직 공수부대가 투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의 진압 강도는 횃불집회 때와 달리 사나웠다. 다만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이날 오전 11시경 경찰들에게 진압방침을 하달했다.

    “분산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저항하는 자는 연행할 것, 연행과정에서 학생들의 피해가 없도록 할 것”
    “조기에 강경 진압하라”
      광주에서 오전 시위상황을 보고 받은 육군본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7공수여단은 광주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3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도록 돼 있었다. 정웅 31사단장은 전남 도경을 통해 경찰의 시위상황을 점검한 결과 아직 공수부대를 투입할 정도의 시위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찰만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정도’라고의 판단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거듭된 공수부대 투입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25분경 31사단장은 헬기로 조선대에 들러 2명의 7공수 대대장, 광주경찰서 경비과장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광주시내 지도를 펼쳐 놓고 시위상황을 점검하면서 오후 4시까지 7공수가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4시경 7공수 33대대는 수창초등학교 부근 금남로 끝 지점에서 학생시위대를 향해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강제진압을 시작했다.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쫓아가 진압봉으로 강하게 타격했다.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수대원 2~4명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진압봉으로 때렸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일반 가정집 안방에까지 군화를 신은 채 들어갔다.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짐짝처럼 군 트럭 적재함에 던져 넣었다. 대검을 진압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몸서리를 쳤다. 도청 부근 금남로 1가에서 공수부대는 경찰을 구타하기도 했다. 그 경찰은 붙들려온 시민과 학생들을 몰래 풀어주다 공수부대에게 들켰던 것이다.

       광주의 최초 사망자는 18일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4세)이었다. 김경철은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진 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굼뜬 그의 행동을 보고 일부러 그런다고 더욱 두들겨 팼다. 그 결과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상식적인 수준의 시위 진압이 아니었다.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시위대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이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 일지’에는 5월 18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연행된 숫자가 모두 405명이라고 적혀 있다. 대학생 114, 전문대생 35, 고교생 6, 재수생 66, 일반시민 184 등이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2. 5월 19일

       5월 18일 오후 2시 30분경, 전두환, 정호용 등 신군부 수뇌부는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부대를 광주에 급히 내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988년 국회 5‧18청문회에서 11공수의 광주 증파 이유를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서 소요 진압을 못하고 고전을 치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호용의 이 말은 거짓이다. 7공수가 광주 금남로에 투입된 시각은 18일 오후 4시였다. 11공수 증파는 그보다 1시간 30분이나 앞선 시각 결정된 것이다. 7공수가 시위진압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마치 진압하면서 고전을 치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증파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공수부대 광주 증파는 현지 시위진압 상황과 상관없이 신군부 핵심부의 강경진압 방침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급습하듯 전격적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분노를 크게 자극하였다. 11공수부대는 19일 오전 광주시내에서 아직 시위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금남로에 투입돼 장갑차를 타고 다니며 시민들을 겁주기 위한 위협시위를 전개했고, 여기에 분노한 시민들이 오히려 더 시위대열에 가세하였다.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하루에 한 개 부대씩 연속 3일간 광주에 내려 보냈다. 18일에는 7공수 2개 대대 688명, 19일 11공수여단 956명, 20일 3공수여단 1,477 등 2,856명을 차례로 증파하고, 뒤이어 21일, 22일 이틀 사이에는 보병 20사단 병력 4,093명을 내려 보냈다. 공수부대와 20사단을 합치면 모두 6,949명의 추가 병력이 서울 등 외부로부터 광주에 투입된 것이다. 광주 주둔 31사단 병력과 전교사 소속 계엄군 13,430명으로는 모자라 외부에서 시위진압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부대 6,949명을 투입하여 총 20,379명의 병력이 맨손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가공할만한 진압작전과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광주에 투입된 7·11·3공수부대의 여단장들은 여단본부가 설치된 조선대나 전남대가 아니라 주로 전교사 사령부가 위치한 상무대에서 머물렀다. 직속상관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교사에다 전용사무실과 공수부대 상황실, 통신실까지 마련한 채 그곳에서 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에 배치된 공수여단은 31사단이나 전교사가 ‘작전통제’를 하도록 엄연히 육군본부가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비록 공수여단 직속상관이라 할지라도 이들 3개 공수여단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수부대 여단장들은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았거나 아예 무시했다. 전교사에서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시만 따랐다. 11공수여단장 최웅은 헬기로 전교사와 조선대를 왕래하며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1996년 검찰은 11여단장 최웅에게 여단본부를 벗어난 지역에서 지휘한 것은 ‘위수지역 이탈’이 아니냐고 추궁하였다. 최웅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했다. 3여단장 최세창도 여단본부가 있던 전남대가 아닌 전교사에서 줄곧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머물면서 무전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최세창 역시 검찰에서 당시 자신의 행위가 ‘위수지역 이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잘못을 시인했다.

       이들 두 여단장의 진술은 당시 진압군의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않고, ‘이원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은 ‘지휘체계 이원화’를 처음 언급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뒤 31사단장, 전교사 작전참모 등이 당시 시위진압에 나선 공수부대가 정식 지휘계통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지휘권한이 없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경진압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는 ‘계엄사령관 – 2군사령관 – 전교사령관 – 31사단장 – 작전통제부대장(3개 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안사령관 – 계엄사령관 – 특전사령관 – 공수여단장’으로 진압작전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즉, ‘2군사령관 – 전교사령관 – 31사단장’이 공식 지휘체계에서 배제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지휘체계가 이원화가 가능했던 것은 보안사령관의 정보 독점과 조기 강경진압 방침 때문이다. 계엄이 아닌 평상시에 보안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통제를 받아 육‧해‧공군 등 3군의 보안업무를 감시하고 대공정보를 수집 분석 수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평소에는 육군참모총장도 보안사령관의 감시를 받는 시스템이다.

       계엄령이 내리면 보안사령관의 위치가 달라진다. 국방부장관이 아닌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 수행)의 지휘를 받도록 계엄법에 규정돼 있다. 계엄이 선포되면 국방부장관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되고 계엄사령관이 3군을 통제하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 지휘체계를 어기고 평상시에 국방부장관에게만 보고하던 습성대로 움직였다. 12‧12군사쿠데타 이후 자신에게 집중된 강력한 힘을 이용하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참모총장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포의 금남로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밤을 새운 광주 시민들은 다음 날인 19일 아침,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 몸서리쳤다. 19일 광주 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가 정상 수업을 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도 대체로 정상적으로 근무했지만 일손을 거의 놓은 채 불안한 모습들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이 시내 전 지역에 걸쳐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금남로에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막았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금남로로 나왔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사람은 2,000~3,000명에 이르렀다. 18일과 달리 시위대열 속에는 대학생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훨씬 많았다. 10시 40분경, 충장로에서 경찰과 공수부대는 시민을 향해 최루탄을 쏘며 해산에 나섰다. 시민들은 그냥 쫓겨 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자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해 시위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밤중에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이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이다.

      11공수의 진압작전은 어제 7공수와 마찬가지로 강력했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 기사, 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원생들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 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긴 채 발가벗겨져 군 트럭에 실려 갔다.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지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 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손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사람들을 광주 시내의 병원 시설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일 오후, 시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시민들의 눈에 비친 공수부대는 더 이상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로 바뀌었다. 시위 양상도 점점 과격해졌다. 오후 4시 50분,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를 하였다. 고등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주위 시민들의 도움으로 즉각 전남대병원에 옮겨져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M16 총알이 복부 오른쪽을 관통해 좌측 엉덩이로 빠져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광주 시내 시위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정부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해 아무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 매체들도 계엄 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19일 밤, 시위는 통행금지도 소용없을 만큼 격렬하게 자정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인원만 277명에 이를 정도였다. 부상자 가운데 5명은 날카로운 대검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찔려 ‘자상’으로 확인되었다.

      전교사의 〈광주 소요 사태 분석-교훈집〉은 광주 시민이 공수부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벌이게 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해산보다는 체포 위주로 협공, 소요 진압 중 지역 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 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 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 파괴, 가족 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 폭발’, ‘소요 진압 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 방치로 주민들의 감정을 촉발’
      군 자료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7‧11공수의 초기 진압 작전은 ‘과잉진압’이라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참혹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AP통신 테리앤더슨 기자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은 ‘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 시민의 시위 행위를 진압한 행위가 내란죄의 구성 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 폭행, 협박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수뇌부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러한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이용하여 위와 같이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므로, ‘간접 정범의 방법으로 내란죄를 실행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인 제임스 D.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 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3. 5월 20일

    대중 봉기
      밤새 내리던 비가 20일 오전 9시경 그쳤지만 오전 중 시위는 소강상태였다. 20일 새벽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35세, 일용노동자)가 광주공원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전두부 열상’으로 앞머리가 찢어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유인물〈투사회보〉가 뿌려졌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되어 들불야학 팀이 만들었다. 관제 언론과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오후 3시 금남로, 공수부대의 진압과 시민들의 저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와 달리 시민들 가운데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 결사적이었다. 오후 7시, 200여대의 택시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해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택시와 버스, 트럭 행렬은 시위 군중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차량 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공수대가 도청을 향해 다가오는 차량행렬을 향해 최루탄을 쏟아 부었다.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부수며, 닥치는 대로 운전기사를 끌어내 두들겨 팼다. 잠시 물러난듯하던 시위대가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해 도청을 향해 거센 파도처럼 다시 압박해 들어왔다. 군경 저지선이 금남로 3가에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밀려갔다. 7시 30분경,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벌어졌다. 20일 초저녁 차량 시위는 평범했던 시위가 거대한 규모의 ‘대중봉기’로 질적인 변화를 겪는 계기가 됐다.

      시위대는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밤 9시 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시위대의 광주고속버스 차량에 경찰 4명이 깔려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밤 10시경,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는 광주역 근처 KBS 방송국도 불탔다. 혼란에 휩싸인 광주상황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 1시경, 광주세무서도 불길에 휩싸였다. ‘군대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데, 군인들이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국민을 죽이러 왔다’며 격분한 것이다.

      뜨거운 항쟁의 열기가 광주를 달궜다. 분노의 도가니였다. 자정 무렵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집중 방어하던 도청, 광주역, 조선대 세 곳을 향해 몰려들었다. 거리와 주택가는 암흑으로 변했다. 시위대의 분노만 차량 불빛을 따라 출렁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함성과 차량의 경적 소리가 도심을 뒤덮었다. 이날 밤 혜성처럼 나타난 전옥주, 차명숙 두 여성이 방송차량에서 마이크를 잡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새벽까지 이끌었다. 10만여 명의 인파에 포위돼 버린 공수대원들은 공포심에 휩싸였다. 방송하는 두 명의 여성을 저격하려고 시도했으나 불가능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3공수가 방어하던 광주역 일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시위대 차량이 광주역을 향해 군의 저지선 돌파를 반복적으로 시도하자 3공수부대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날 밤 광주역에서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앞선 시각 밤 10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공수대원 1명이 시위대의 화물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계엄군 희생자로서는 최초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유사시에는 발포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향해서 공공연하게 ‘총격전’을 시작한 것이다.

      광주역 발포는 3공수여단장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발포’였다. 실탄 분배와 발포는 계엄 상황일지라도 매우 엄격하게 통제된다. 계엄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승인에 의해서만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3공수여단장은 실탄 분배와 집단 발포를 계엄사령관은 물론 작전통제 부대장인 31사단장, 전교사령관, 2군사령관 등 공식지휘체계 상에 있는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3공수의 발포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2군사령부는 밤 11시 20분 ‘발포 금지’, ‘실탄 통제’ 등의 지침을 전교사에 긴급히 내려 보냈다.

      자정 무렵 전교사령관은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에 대한 광주시민의 감정이 너무 악화돼 시위진압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시키고, 보병부대를 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계엄사령관은 전교사령관 보고내용을 국방부장관과 협의한 뒤 공수부대 외곽 철수를 승인했다. 계엄수뇌부도 공수부대로는 시위대의 저항을 더 이상 잠재울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21일 새벽 2시, 3공수여단은 광주역 사수를 포기하고 쫓기듯 전남대로 퇴각하였다.

      광주역 발포로 사태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공수에 이어 도청을 방어하던 11공수여단에도 이날 밤 실탄이 분배됐다. 11공수여단의 실탄 분배는 다음날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이어졌다. 또한 광주역 집단 발포는 시위대를 크게 자극했다. 시위대는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 죽이는데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이런 주장은 시위대들 사이에 공감을 얻어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에 직접 불을 지른 것은 21일 오후 1시 대낮에 공수부대가 시민을 향해 집단으로 발포한 상황이었다.

    4. 5월 21일

      광주역에서 3공수의 예상치 못한 패퇴는 신군부 지휘부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계엄사령관은 21일 새벽 4시 30분, 긴급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 ‘공수부대 외곽 철수’, ‘광주 봉쇄’ 등의 방침을 정했다. 진압작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계엄사 공식회의에서 발포와 관련해서 ‘자위권 발동’이 처음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미 5시간 전 광주역에서는 3공수여단장의 발포 지시가 있었다. 이 점 때문에 계엄사가 아닌 비공식 지휘체계를 통해서 발포명령이 지난 밤 하달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계엄사령관은 오전 9시 20분이 지나서야 지난밤 광주역에서 있었던 발포사실과 그 뒤 계엄사 새벽 회의에서 검토한 ‘자위권 발동’ 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오후 2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수뇌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장관실에서 계엄사 회의에서 거론된 ‘자위권 발동’을 확정했다. 그런데 이 시각 역시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 사태가 벌어진 때보다 1시간이나 경과한 뒤였다. 이렇듯 ‘발포’와 ‘자위권 발동’을 둘러싸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군의 기록과 관련자들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혹과 추측을 낳고 있는 것이다.
    가자, 도청으로!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 지 4일째였다. 이날 아침 금남로에는 지난밤 광주역 발포 때 사망한 시신 2구가 등장했다. 대형 태극기에 덮인 채 손수레에 실려 있는 시신은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위대의 식사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했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 음료수, 빵 등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 차량에 올려줬다.

      21일 아침 20사단 대규모 보병 병력이 광주에 증파됐다. 시내 중심부에 고립된 채 포위 상황에 처한 공수부대를 대신해서 일반 군인을 투입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획이었다. 한편으로는 광주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여 광주를 외부세계와 단절시킬 계획이었다. 20사단 정규군의 투입은 시내 중심부에서 공수부대가 주도하던 시위진압을 포기하고 외곽봉쇄로 전환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외곽봉쇄는 굳이 서울에서 20사단 병력 4천여 명을 광주로 데려와 투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전교사 1만여 명, 31사단 1,454명 등 모두 1만5천여 명의 계엄군이 광주에 이미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 수뇌부는 이들이 진압작전에 소극적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20사단 병력 4천여 명을 광주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20사단은 공수부대와 호흡을 맞춰 충정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시위진압에 최적화된 부대였다. 공수부대와 달리 정규군 20사단은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받아야 이동할 수 있었다. 한미연합사는 22일에야 20사단의 광주이동을 사후 승인했다. 20사단은 하루 전인 21일 광주로 이동한 것이다.
    도청 앞 집단 발포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는 순간 공수부대의 M16 총구가 시위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때 발포 병사들은 ‘횡대 무릎 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시민들이 먼저 발포했다면 병사들은 총탄을 피하기 위해 골목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사격을 하더라도 몸을 낮춘 상태의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서있게 ‘횡대’로 대열을 유지한 채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 상태였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사격상황을 통제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자세다.

      시위대 앞줄에 서 있던 몇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 한 가운데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금남로에서 사라졌다. 옆 골목 건물 뒤로 피한 것이다. 총성이 멎자 골목에서 사람들이 나와 희생자를 도로 밖으로 재빨리 끌어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일부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잠시 후 골목에 몸을 숨겼던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 한 가운데로 나와 도로가 가득 찼다. 이번에는 도청 부근 높은 건물 위에서 저격병들이 조준사격을 했다. 시위대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또 쓰러졌다. 다시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오후 4시경 공수부대가 도청 사수를 포기하고, 조선대로 퇴각할 때까지 이런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집단발포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25분, 전옥주, 김범태 등 시민 대표 3명은 장형태 도지사에게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했다. 공수부대 철수를 건의하겠다는 도지사의 말을 믿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정오가 넘도록 공수부대는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침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직전, 시위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거센 위세에 계엄군이 뒤로 밀려났다. 이때 엉겁결에 후진하던 계엄군의 장갑차 바퀴에 깔려 공수대원 1명이 사망하였다. 곧이어 계엄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다.

      금남로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순식간에 텅 비었고, 적막에 빠졌다. 쓰러진 사람들의 핏물이 흥건히 아스팔트를 적셨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금남로에 나뒹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시민들은 넋을 잃었다. 잠시 후 끓어오르는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었다. 첫 집단 발포 직후 금남로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간 저격병들이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조준해서 사격을 하였고, 그때마다 시민들이 쓰러졌다.

      이날 도청 앞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몇 명이나 희생당했는가? 이 집단 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곳 현장에서 최소 54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항쟁 1년 후 육군본부가 진압작전에 참가한 공수부대의 상황 일지를 종합 검토해서 편찬한 자료집 〈소요 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시위대에게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라고 특정했다.

      그 시각 이후부터 시위대가 화순이나 나주지역의 각 경찰서나 지서에서 획득한 무기로 스스로를 무장한 것이다. 2018년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도청 앞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총탄자국은 ‘헬기사격에 의한 것’이라고 확인됐다. 최초 발포상황, 그 직후 지속적인 조준사격, 헬기사격 등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발포가 아니라 ‘발포 명령’에 따라 총을 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당시 작전문서들을 조작하거나, 왜곡 변조해서 발포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발포명령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특수부대가 침투해서 저지른 발포라는 ‘가짜뉴스’마저 확산시키고 있다. 광주역 발포와 더불어 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일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핵심 사항이다.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도청 앞에서 오후 1시경에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시작되자 격분한 시민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서둘렀다. 시위대 중 일부가 광주 근교로 차량을 향했다.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지의 경찰서나 지서에 보관된 예비군 무기고가 목표였다. 전남지역 각 군의 지서에는 겨우 1~2명 정도씩 밖에 경비 경찰이 남지 않았다. 광주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됐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무기 획득은 어렵지 않았다.

      시위대는 화순 탄광에서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확보했다. 다른 데서도 카빈총과 실탄을 노획했다. 획득한 무기들은 즉시 광주 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렇게 무장한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다. 시민군은 광주공원의 시민회관 앞을 본부로 삼아 대열을 정비했다.

      무장한 시민군이 금남로에 나타난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나주나 화순에서 무기를 가지고 오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부대를 편성했다. 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공원,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졌다. 특수 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급조된 일반 시민군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민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공수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7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방송을 통해 군의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은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계엄군은 봉쇄선에 접근하는 무장 시위대만이 아니라,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다.

      광주 시내 병원들은 총상 환자가 넘쳐났다. 버스나 소형차들이 부상자나 시신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정주부를 비롯해, 여학생, 아가씨들은 물론 어린아이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헌혈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왔다. 부족하던 피가 넘쳐났다.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송정리에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피신했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 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항쟁의 확산
      5월 21일의 도청 앞 집단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 시내를 벗어나 전남지역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항쟁의 불길이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그 지역 청년들이 대거 광주로 들어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광주 시위대가 대거 시외로 나가서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본격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알렸다. 고립된 채 광주에서만 부글부글 끓던 항쟁이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그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광주에서 대학과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남이 고향이었다. 때문에 광주와 전남의 정서적인 유대감은 매우 깊었다.

    5. 5월 22일~26일

    봉쇄작전
      21일 오후 5시경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공수부대는 27일 항쟁이 끝날 때까지 20사단, 31사단과 함께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도로 6군데를 완전히 봉쇄했다. 신군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광주 시위가 서울과 부산 등 지방 대도시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시위대가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던데 비해 서울이나 부산 쪽은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광주에서 서울 등 다른 도시로 향하는 길은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철도, 항공편이 가능했다. 광주공항은 처음부터 군이 장악했고, 철도는 시위대에 의해 이미 막힌 상태였다. 20사단 1개 대대가 호남고속도로 광주톨게이트를 차단했으며, 동광주톨게이트는 광주교도소에 주둔한 3공수여단이 막았다. 남쪽 화순방향은 도청 앞에서 퇴각한 7‧11공수가 봉쇄했다. 계엄군은 봉쇄선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무차별 난사로 대응했다.

      봉쇄작전에서 특이한 사항은 공수부대와 20사단 차단지역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31사단 차단지역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3공수 주둔지인 광주교도소와 11공수부대의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는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고 불릴 만큼 10~20명 정도씩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20사단 차단지역인 광주와 나주 사이에서도 21일 밤중에 10여 명의 시민들이 한꺼번에 사살 당했다. 서울에서 광주에 투입한 ‘충정부대’에서만 유달리 이렇게 희생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에 주둔하면서 강력하게 고속도로 봉쇄작전을 펼쳤다. 21일부터 23일 사이에 10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신은 교도소 뒷마당에 가매장됐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교도소 옆 고속도로나 국도를 경유해서 광주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계엄당국은 이 희생자들이 ‘교도소를 습격하려 했다’고 왜곡했다. 하지만 실제 밝혀진 희생자 가운데는 21일 저녁 무렵 광주에서 농기구를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담양 대덕마을 주민들도 있었고, 5살짜리 딸과 아내를 자신의 화물자동차에 태우고 22일 아침 고향 진도로 향하던 일가족도 고속도로 입구에서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봉쇄작전은 어떠한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행되었다. 만약 차단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알렸더라면 이렇듯 무고한 민간인 희생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21일 밤 나주에서 광주시내로 진입하던 버스 한 대가 광주 입구 효천역 부근 20사단 봉쇄지점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10여 명이 몰살당한 사건도 그런 경우다. 당시 뒤따르던 차에 탔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만약 봉쇄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봉쇄선에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오후 1~3시 사이에는 송암동 야산에 매복하여 봉쇄작전을 수행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가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는 11공수여단을 무장한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90밀리 무반동총과 크레모아 등으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폭파해버린 오인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1공수대원 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11공수는 곧바로 계엄군의 잘못 때문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11공수대원들은 이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근처 송암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분풀이 학살을 자행하였다.

      집안에서 장기놀이를 하던 마을 청년 3명을 밖으로 끌어내 철길 부근에서 사살해버렸고, 하수구에 겁에 질려 숨어있던 50세 여인에게도 총을 난사해 숨지게 하였다. 보안사에서는 이 사건이 계엄 수뇌부의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군사반란’으로 의심하여 은밀하게 조사했지만 전교사와 충정부대(공수부대, 20사단)와의 사이에 ‘지휘계통의 혼선으로 인한’ 오인사격으로 밝혀졌다.
    절대공동체
      5월 22일, 항쟁 5일째 날이 밝았다.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였다. 벅찬 감동이 도청 앞 광장에 넘실거렸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는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외곽이 봉쇄된 한정된 공간이었지만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길거리에 방치된 부서진 차량을 치우고, 금남로를 적셨던 핏자국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광주공원에서는 시민군들의 재편성 작업이 시작됐다. 아침 일찍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내부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 지역에서 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기동순찰대를 편성하여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출동하도록 대기시켰다.

      시민들은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정상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식량 공급도 이뤄졌고, 전기‧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됐다.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병원들도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이 남아돌았다.

      경찰에 의한 치안유지 활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귀금속 상점에서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대책위원회’나 시민군에게 필요한 자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시민군들의 매끼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주먹밥 등으로 해결되었다.

      시민들은 이 기간 동안 매일 도청 앞 광장에 모여 향후 어떻게 대처할 지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행동방침을 정했다. 분수대 위에는 누구든 올라가서 발언할 수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서로의 의견을 모았고, 거기서 결정된 바에 따라 스스로 행동에 옮겼다. 봉쇄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직접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을 둔 완벽에 가까운 자치공동체를 경험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헌신하는 이런 모습은 인류역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집단적 도덕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5‧18 기간 중 공동체의 절대위기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학자들은 ‘절대공동체’, ‘대동세상’, 혹은 ‘에로스 효과’라고 불렀다. 역사의 특별한 시기에 짧지만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이런 소중한 체험은 광주시민들의 집단기억 속에 깊게 새겨진 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수습대책위원회
      22일 낮 12시 30분경, 신부‧목사‧변호사‧교수‧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일반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중심이 된 ‘일반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대민 업무를 맡았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 통제반, 무기 수거반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일반 수습위는 토론 끝에 계엄 당국에 제시할 7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1. 계엄군의 과잉 진압 인정
    2. 구속 학생 및 민주 인사 연행자 석방
    3. 시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 보상
    4. 발포 명령 책임자 처벌과 국가 책임자의 사과
    5. 사망자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할 것
    6. 수습 후 시민 학생들을 보복하지 말 것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기 자진 회수 및 반납 무장 해제
      일반 수습위원회는 위 7개 요구사항을 가지고 협상대표 8명이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계엄 당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과잉 진압에 대해 시민들이 과격하게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시민 대표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면서 ‘조건 없는 무기 반납’만을 요구했다. 첫 협상에서 계엄 당국은 시위 도중에 붙잡혀 온 사람들 일부를 선별하여 석방했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1차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시민 대표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협상보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협상 대표 일부가 계엄 당국의 강경 입장을 전하면서 ‘무기 반납과 군인에게 치안 유지를 맡겨야 한다’고 발언하자, 듣고 있던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시민들이 납득할 만한 사태 수습 방안을 계엄 당국이 먼저 제시한 후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그 후 이어진 계엄 당국과의 몇 차례 협상에서는 ‘무기 반납’이 가장 큰 쟁점이었다. 계엄군의 강경 기조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 대표들의 입장은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신군부 지휘부는 22일 오전 10시 시위진압에 소극적인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을 소준열 소장으로 전격 교체했다. 이에 앞서 21일 오후 4시경에는 형식적이나마 31사단장이 가지고 있었던 공수부대의 작전통제권을 전교사령관에게로 전환시켰다. 이 두 가지 조치를 통해 신군부는 지금까지 강경진압 방침에 보이지 않게 반발하며 갈등을 빚었던 전교사령관과 31사단장을 형식적인 지휘라인에서도 완전히 배제시켰다.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23일, 시 외곽 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광주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아주머니들이 길가에 솥을 내다 걸고 밥을 지어 밤샘 경계 근무를 서는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도청 앞 광장은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상무관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배열됐고,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신들 위에는 무명천이 덮였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참배를 기다렸다.

      한편 지난밤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일반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새워 대민 질서, 홍보, 장례, 무기 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무기 반납 문제에 대해서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도 팽팽한 시각차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 반납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계엄 당국의 납득할 만한 조처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무기를 회수할 경우 계엄군과 협상조차 해보지 못하고 진압당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무기 회수에 앞서 계엄군에 대한 방어 태세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큰 호응을 얻었다.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는 23일부터 26일까지 하루에 1~2회씩 모두 5차례 열렸다. 이 대회를 통해 ‘무기 반납’ 등 협상 의제에 대한 체계적인 의견수렴은 물론, 일반수습대책위원 교체를 통한 협상력 강화, 대학생 시민군 자원봉사자 모집, 시민 생활의 질서 유지 활동 등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었다.

      수습대책위원회가 나서서 ‘무기 회수’에 앞장섰다. 25일까지 회수된 총기는 모두 4,500여 정이었다. 전체 5,000여 정 가운데 90% 정도가 회수된 것이다. 무기 회수는 ‘양날의 칼’이었다. 상당수의 시민들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당장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그렇다고 회수된 총기를 계엄당국의 요구대로 무조건 반납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수습위원회는 계엄군에게 반납하는 조건과 방법은 잠시 미룬 채 무기 회수를 진행했다. 회수된 무기는 우선 도청 지하실 임시 무기고에다 쌓아 두었다.

      그런데 시민 안전을 명분으로 추진했던 무기 회수는 역설적으로 계엄군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무장한 시민군의 숫자도 무기 회수 정도에 따라 약 5,000명에서 500명 정도로 10분의 1로 줄었다. 외곽을 방어하는 시민군들은 도청 내 수습대책위의 의견 대립과 관계없이 대부분 무기 반납을 거부한 채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자기희생적인 도덕성과 자치 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온건파와 항쟁파
      5월 24일, 항쟁 7일째로 접어들면서 수습대책위원회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날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김창길 위원장의 사회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온건파와 대립하여 항쟁파로 분류되던 김종배, 허규정 등의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채택됐다.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 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학생수습위는 항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가 한걸음 물러섰다. 일반수습대책위에도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무조건 무기 반납을 주장하던 온건파 대신 재야민주인사 및 천주교 신부들로 교체되었다. 수습대책위 내부가 의견 대립으로 흔들리자 이를 틈타 군의 정보 요원들이 도청에까지 잠입하여 교란 작전을 시도했다. 25일 아침 8시, 도청 내부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했다. 독침사건의 주인공은 보안사가 시민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시킨 인물로 후일 밝혀졌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봉쇄 작전을 펼치는 동안 광주시민들은 왜곡보도를 일삼는 국내 언론과 달리 외신기자들에게는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항쟁지도부 등장
      25일 밤 10시, 온건파와 갈등 끝에 항쟁파 중심으로 ‘항쟁지도부’가 새롭게 탄생했다. 항쟁지도부는 학생수습대책위의 일부 항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무장 투쟁 국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기층 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항쟁지도부는 즉각 무기 회수를 중단시켰다. 온건파의 ‘아무런 조건 없이 총기를 내려놓고 도청을 비워버리자’는 주장과 달리 ‘시민들의 투쟁역량을 재정비하여 계엄군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다. 각자 역할을 새롭게 분담하고, 시민 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26일 오전, 항쟁지도부는 시민군의 무장 전열부터 재정비했다. 기존 기동순찰대를 해체하고 기동타격대로 새롭게 편성했다. 만약 계엄군이 공격해 오면 도청 지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다이너마이트로 대항하겠다며 계엄당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항쟁지도부가 협상의 최후 수단으로 삼았던 시민군의 다이너마이트는 이미 계엄군의 손에 의해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틀 전 24일, 한밤중에 온건파 지도부의 묵인 아래 계엄군 폭발물 전문 요원이 도청 지하 무기고에 몰래 들어와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뇌관을 전부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항쟁지도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항쟁지도부는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하였다. 광주시장과 전남도의 국장급 공무원들에게 출근하도록 하여, 머리를 맞대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사항을 강구하였다. 광주시가 책임지고 매일 쌀 한 가마씩과 부식 및 연료 등 생필품을 생계가 어려운 시민들에게 공급토록 하고, 시내버스가 정상 운행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희생자 시신을 입관할 관 40개와 구급차 1대도 마련키로 하고, 장례는 ‘도민장’으로 치르자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때 무력진압 방침에 대해 미군과 협의를 마치고,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신군부 수뇌부는 25일 낮 12시 15분, ‘상무충정작전’ 디데이를 27일 새벽 0시1분 이후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신군부가 상무충정작전을 결정한 25일 낮 12시 15분은 전남 도청에서 항쟁지도부가 아직 탄생하기 전이었다. 항쟁지도부는 25일 밤 10시에 만들어졌다. 신군부는 항쟁파의 도청 장악 때문에 진압작전을 서둘렀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25일 낮 황영시 육본참모차장과 김재명 육본작전참모부장은 작전명령서를 가지고 직접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다. 25일 오후 7시에는 전두환의 제안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와 선무 방송을 했다. ‘계엄 당국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광주 시민을 설득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항쟁파의 저항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

    6. 죽음의 행진과 26일 밤

      5월 26일 새벽 4시,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들어왔다. 27일 새벽 도청 소탕작전을 앞두고 시민군의 반응을 미리 떠보고, 교란시키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이 설치한 바리게이트를 깔아뭉개고 1㎞쯤 밀고 들어와 농성동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새벽 도청에는 비상이 걸렸다. 청년들이 아닌 나이 든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진입을 막겠다고 앞장섰다. 이성학 장로, 김성용 신부 등 17명이 도청을 출발해 농성동 계엄군을 향해 약 4㎞ 정도를 무거운 침묵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바 죽음을 각오하고 온몸으로 계엄군의 진입을 막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나선 ‘죽음의 행진’이었다. 김성용 신부 등 11명은 그 길로 전라남북계엄분소로 가서 마지막 협상을 진행했다. 계엄 당국은 26일 자정까지 모든 무기를 버리고 도청을 비우라고만 요구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이었다.

      26일 오후 계엄군의 진입작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항쟁지도부는 두 차례에 걸쳐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시민들은 평화적인 수습 노력을 외면한 채 대량 살상이 예상되는 유혈 진압을 강행하겠다고 위협하는 계엄군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격렬하게 규탄했다. 이 궐기대회에서 채택한 7개 항으로 된 ‘80만 광주 시민의 결의’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할 하고자 했던 시민들의 의지를 오롯이 담고 있다.
     
    첫째,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둘째, 무력 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은 즉각 해제하라.
    셋째,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넷째, 구속 중인 민주 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 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다섯째,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 조작, 왜곡 보도 하지 말라.
    여섯째,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피해 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일곱째,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한다.
      이 결의문은 초기에 ‘수습’에만 초점을 맞췄던 협상안과 달리 ‘계엄 해제, 전두환 처단, 그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했다. 항쟁의 성격을 ‘민주화운동’으로 분명하게 표방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광주 시민의 힘만으로 이런 주장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민들은 최후까지 결사 항전을 결의했으며, 그날 오후 마지막 궐기대회 자리에서 청년과 대학생 중심으로 광주를 지킬 지원자를 모집했다. 궐기대회가 끝나자 스스로 YMCA에 모인 사람들이 150여명이나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군 경험이 전혀 없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었으며, 여성도 1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궐기대회 직후 항쟁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서 외신기자 회견을 열어 ‘미국이 나서서 도청 유혈진압을 중지시켜 달라’는 의견을 밝혔다. 외신기자를 통해 주한 미 대사와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26일 밤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한 것을 예상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사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고등학생이나 여성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서 ‘우리가 왜 마지막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사 항전을 앞둔 도청 내 시민군의 분위기는 비장하고, 결연했다.

    7. 5월 27일, 새벽의 마지막 불꽃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지역의 전화를 모두 끊어버렸다. 김종배, 박남선 등 항쟁지도부는 26일 오후 궐기대회가 끝난 후, YMCA에 자원해서 모인 청년 학생 150여명을 기존의 시민군과 섞어 전투조로 새롭게 편성하였다. 자정이 넘어 새벽 2시쯤 외곽지역 순찰을 돌던 기동타격대의 시야에 계엄군의 진입 움직임이 포착됐다. 순찰조의 무전 보고를 통해 계엄군 진입이 확인되자 항쟁지도부는 도청을 중심으로 YMCA, YWCA, 전일빌딩, 계림국민학교 등 주요 방어 지점에 새벽 3시경까지 시민군 배치를 완료했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 진입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박영순은 도청 내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고, 그 방송은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집 안에 있던 시민들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공포감이 짙은 안개처럼 도심을 감쌌다. 그날 밤 그녀의 절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던 시민들은 청년 학생들이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 담장을 따라 늘어 선 방호 초소마다 2~4명씩 한 조가 되어 배치되었다. 본관 건물 안에서는 1층부터 3층까지 정문을 향한 복도에서 유리창 넘어로 분수대 광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도청과 전일빌딩 사이 광장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가득했다.

      3공수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새벽 4시 무렵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도청 뒷담을 넘어 침투한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댔고,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해 들어간 다음 옥상부터 훑어 내려왔다.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폭도 소탕 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오전 5시 10분경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YMCA,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 당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항전은 끝났다. 완전한 소탕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 후 7시경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항쟁의 피로 붉게 물든 광주의 아침이 밝았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 폭도’, ‘극렬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1980년 5월 열흘간에 걸친 광주 민중의 무장 투쟁은 막을 내렸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약 25명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도청과 그 주위에서 진압작전 당시 사망한 사람은 17명으로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날 아침 도청에서 체포되어 연행된 사람은 약 200명 정도였다.

      5‧18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사법부 판결
      1980년 신군부는 계엄 상태의 군사 재판에서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국가의 헌법을 문란하게 한 내란’이라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2,522명을 검거했고, 훈방 1,906명, 군법회의 회부 616명, 그 가운데 212명이 불기소 처분되었고, 404명이 군사 재판을 받았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83명에 대하여 계엄법 위반, 내란주요임무종사, 살인 등의 죄목으로 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된 지 3일 만인 4월 3일, 관련자 83명 전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조치가 취해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정동년은 무기로, 상황실장 박남선 등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됐고, 그해 12월 크리스마스까지 형 집행정지 등으로 모두 풀려났다.

      17년 후인 1997년 대법원은 광주 시민의 저항은 ‘내란 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 행위’라는 1981년과 전혀 다른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신군부가 광주 시민을 살상한 것은 ‘내란’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판시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유혈진압에 대해서는 ‘광주 시위가 타 지역으로 확산되면 정권 장악이라는 목적 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신군부가 자행한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신군부가 ‘5.17 내란’을 일으켰고, 광주시민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으로 용기 있게 맞섰다고 본 것이다.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위협을 가해 ‘그 권능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헌법을 수호할 최후의 수단은 국민들의 결집된 저항일 수밖에 없다. 27일 새벽 신군부의 내란에 반대해 결집했던 광주 시민들은 ‘헌법기관에 준하여 국가가 나서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 행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 행위’가 아니라 신군부의 내란 행위를 저지해 ‘국헌을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대법원은 27일 새벽 전남도청과 광주 시내 일원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발포 행위에 관련된 책임자 5명을 ‘내란 목적 살인죄’로 처벌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등이 바로 그들이다. 또 대법원은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은 신군부 지휘부가 도청의 무장 시위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해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작전을 강행하도록 명령한 것은 살상 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 작전에는 ‘발포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런 이유로 10일간의 항쟁 기간 중 유일하게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에만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하였다.
    5‧18민주화운동과 미국

    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입장

      우리나라 군부대의 작전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미국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만행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까? 광주의 비극이 최고조에 달했던 5월 22일 미국 국방성 대변인 토마스 로스가 발표한 성명에서 그 윤곽을 읽을 수 있다. 토마스 로스 대변인은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이날 미 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는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소요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나.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이양

      미국은 이미 1980년 5월 16일에 20사단의 작전 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승인 문서를 한국군에 전달했다. 또한 신군부가 20일에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에 관한 문의’를 하였다. 이에 위컴은 ‘워싱턴에 있는 상관들과 협의한 후 동의(agreed)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확대에 대비, 광주지역 질서유지를 위해 5월 23일 12:00부로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는 부대사용 협조문”을 보냈다. 그러자 연합사령관은 즉각 “승인”한다는 전문을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제2대대는 23일 12시 25분에 성남비행장에서 광주투입작전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실제 광주에는 투입되지는 않았다.

      미국행정부가 남침의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광주사태가 더 격화될 경우 남침할 수도 있다’는 식의 경고를 계속한 것은 일반 국민이 5·18민주화운동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광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국회해산, 비상기구설치 등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직·간접으로 지원·옹호했다. 또한 신군부의 불법적인 내란에 저항했던 광주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자행한 학살을 방조 혹은 묵인했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진상규명 운동과 책임자 처벌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지만 광주 시민과 민주화를 갈망했던 국민들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5‧18 진상규명 운동’을 전개했다. 신군부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유족, 구속자, 부상자들이 5‧18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80년대 중반, 광주학살의 진상이 외부에 조금씩 알려졌다. 그때부터 전국의 모든 집회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살인자 처벌’ 구호로 시작되었다. 김의기,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박승희 등 이 과정에서 수없이 죽어간 열사들은 5․18을 다시 세우는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5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1987년 6월 시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진실의 일부분이 공중파 TV를 통해 안방에까지 가감 없이 전달되면서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집권하면서 그해 5월부터 전국적으로 5‧18 진상규명 운동이 다시 거세게 시작됐다.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공소시효 만료(1995년 8월 15일)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1994년 3월 ‘책임자 고소 고발 사업,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등을 목적으로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5‧18 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 계승 국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이 앞장서서 1994년 7월 294명의 연서로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 및 고발했다.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검찰은 ‘공소권’이 없다는 이유로 5‧18 관련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외면했다. 그러자 전국의 시민 사회단체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책임자 처벌 운동이 더욱 격화되었고, 마침내 1995년 10월 26일 ‘5‧18 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집회와 시위, 농성 등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면서 신군부의 부정 비리 청산도 함께 주장했다.

      5‧18민주화운동은마침내 그해 12월 19일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의 사법투쟁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핵심세력에 대한 검찰의 본격적인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35명이 5‧18 내란 혐의로 기소되었다. 치열한 공방 끝에 1997년 4월 18일 대법원은 ‘헌법이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며 신군부 세력을 처벌했다. 전두환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 노태우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 황영시 징역 8년, 정호용 징역 7년 등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 주동자 15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세계 역사에서 전직 대통령 2명이 한꺼번에 감옥에 간 것은 전례가 없었다. 이들은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모두 석방됐다. 당시 집권을 눈앞에 둔 김대중 후보가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이유로 5‧18단체와 국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면을 강력히 주장했던 결과였다.

    피해 보상과 기념사업

      5‧18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위한 정부의 공식 대책은 1988년 4월 1일부터 본격화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만들어진 ‘민주 화합 추진위원회’의 의견을 바탕으로 ‘광주사태 치유 방안’을 만들었다. 1990년 7월 5‧18관련자의 피해 배상과 보상의 근거가 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시작되었다.

      2017년 5월 현재 제6차 보상까지 이루어졌는데, 지금까지 광주시에 신고된 5‧18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는 사망 155명, 상이 후 사망 110명, 행방불명 81명, 상이자 3,378명, 기타 910명 등 총 4,634명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직접 신체에 상흔을 입은 사람들에 국한된 것일 뿐이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직간접적 피해와 파생적 피해는 가늠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8 관련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항쟁에 참여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보상과 더불어 ‘5‧18민주유공자’로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생사를 넘나들던 고통을 기억하며, 의의를 기념하는 장소와 공간이 조성되었다. 1997년 옛 망월묘역 옆에 국립 5‧18 민주묘지가 새로 조성되었다.

      아울러 1999년 4월에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연행되어 구금 및 재판을 받았던 옛 상무대 영창과 법정 그리고 헌병대 막사는 원래 위치해 있던 곳 인근으로 옮겨져서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계엄군의 지휘 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옛 상무대의 일부는 5‧18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항쟁정신의 계승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시민군들의 최후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그 일대는 국가의 약속에 따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조성되었고, 그 내부는 5‧18을 기념하는 특별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5‧18 당시 격전지를 중심으로 광주·전남에 사적지 안내 표지석과 안내판 등이 설치되었다.

    5‧18 자료의 세계기록유산등재

      5‧18민주화운동은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항거로 전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미흡하지만 학살 책임자를 국민의 힘으로 법정에서 처벌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과거사 청산 운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특히 1980년 5월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과 인권 및 평화 운동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겪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계엄당국은 불순분자, 폭도, 난동, 폭동으로 매도했지만 비인간적인 폭력에 결연히 맞섰다. 도시가 완벽하게 포위된 채 고립되고, 진실을 외면하는 대중 매체, 군 정보요원들의 교란작전이 난무하였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누구든 달려가 도왔다. 항쟁지도부가 수습 방법으로 고심할 때 시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 나갔다.

      계엄군 퇴각 이후 6일 동안 치안의 공백 상태에서도 시민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질서를 유지했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 수중에 있었지만, 사고나 불상사는 한 건도 알려진 바 없다. 금융기관,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공격한 장소는 세무서와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 매체들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오월 광주는 계엄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 마음속에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민주 수호에 대한 긍지만은 꺾을 수 없었다.

      19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5‧18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군사지배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다. 시민들의 민주화 의식이 크게 높아졌고, 마침내 이 열흘간의 항쟁에서 흘린 피의 대가로 견고한 군사독재 체제가 무너지면서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2011년 5월 25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의 인권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류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의 기록물로 알려진 1225년 영국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 등과 함께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광주와 대한민국을 넘어서 전 세계가 이 열흘간의 항쟁이 남긴 숭고한 유산을 기리게 된 것이다.
  • 1979년
    • 2월 5일광주 YMCA 강당서 김지하·송기숙·문익환·양성우씨 구속문인의 밤 개최
    • 3월 1일윤보선·함석헌·김대중씨 등 재야인사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 6월 1일김대중씨 자택서 외부연락 일체 차단된 채 연금상태 계속
    • 6월 15일광주교도소 수감중인 성래운 교수, 고영근 목사 등 48명 단식 투쟁
    • 8월 11일경찰, 신민당사서 농성중인 170여 YH무역여공 강제해산, 여성노동자 김경숙 사망
    • 8월 20일천주교정평·김수환 추기경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서울시경까지 시위행진
    • 9월 4일 대구 경북대·영남대생들, 유구철폐 요구 선언문 낭독 후 학생 다수 구속
    • 9월 20일서울대생 1,000여 명, 학원민주화선언 낭독한 뒤 기동경찰과 투석전
    • 9월 26일고려대, 이화여대 , 연대생 등 수천 명 유신철폐 외치며 데모
    • 10월 4일국회, 신민당의원 따돌리고 본회의장 아닌 146호실서 민주공화당의원(159명)들만으로 김영삼총재 징계 전격처리, 30년 의정 사상 최초의 의원제명 사건발생
    • 10월 16일부마항쟁 시작, 부산대생 5,000여 명 유신철폐·독재타도 외치며 시내진출
    • 10월 18일부산대·동아대생, 시민과 합세 대대적 시위, 정부 부산에 비상계엄령 선포 마산에서 경남대·마산대 등 계엄령반대 외치며 데모 공화당사 파괴
    • 10월 26일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선포
    • 12월 12일12·12쿠데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강제연행 총격전
    1980년
    5월 이전
    • 3월 29일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백61명 학원사태관련 성명 발표
    • 4월 3일서울대생 제반 학내 자율활동허용 요구하며 농성 돌입
    • 4월 21일사북사태월 강원도 사북광업소 광부 7백 여명 경찰과 충돌
    • 4월 24일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백61명 학원사태관련 성명 발표
    • 5월 4일 국민연합 성명발표, 학원민주화와 계엄령 해제 요구
    • 5월 14일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를 결의
    • 5월 15일서울시내 30개 대학 7만 여명 밤늦게까지 도심서 시위(1980년 5월 15일 서울 시청앞)

    • 5월 17일전국 55개대 학생대표 95명,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중 연행
    1980년
    5월 18일
    • 5월 18일 (일요일, 맑음) 9시 40분5월14일에서 16일까지 평화로운 민족민주화성회에서 광주학생과 시민들은 비상계엄이 확대되면 도청 앞 분수대에서 모이자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기억한 전남대 학생들이 도서관으로 향하다 광주에 진주한 7공수부대와 접전
    • 5월 18일 (일요일, 맑음) 10시 00분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전남대정문)

    • 5월 18일 (일요일, 맑음) 10시 15분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